2023. 7. 17. 16:27ㆍ평문
근원적 세계, 혹은 중심에 관한 새로운 일깨움
---오태환의 최근 민화풍 연작에 대하여---
이 동 순
나의 경산 시골집에는 아자형(亞字形) 북창이 있고, 그 창문 앞으로 선반이 놓여 있다. 송판을 거칠게 잘라서 붉은 벽돌에 그냥 소박하게 걸친 것인데, 텅 빈 윗부분이 밋밋해서 이런 저런 자잘한 수집품들을 하나 둘 올려두었다. 그랬더니 한결 보는 눈맛이 있다. 거의 모조품이지만 거기엔 제법 형태를 갖춘 백자 연적도 있고, 중국에서 구입한 삼존불(三尊佛)도 있다. 흙으로 빚은 신라 고배(高杯)도 있다. 단지 모양과 분위기만 아슬아슬하게 살아날 뿐이다.
이런 가운데서 가장 우뚝하며 고풍한 분위기로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경주의 친구가 이태 전에 갖다 준 기마인물형 술잔이다. 깊은 밤 백열전등 불빛에 비쳐서 창틀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기마인의 실루엣을 보면 마치 아득한 태고에서 출발하여 어딘지 모를 머나먼 미래시간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세월의 힘겨운 뒷모습을 보는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놀라워라. 뭇 사물이란 이렇게 어울림과 조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인가. 그것이 놓인 환경과 여건의 분위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삶의 지혜다.
밀양의 오태환 화백 작업실을 갈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오 화백이 운영하는 동방화랑은 온통 골동적(骨董的) 분위기로 가득하다. 오 화백은 오래된 물품에 대한 애착과 인식이 유난히 각별하다. 낡은 유물들은 일단 오 화백의 화실에 들어온 순간 곰팡내 풍기는 유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한다.
도안이 아름다운 와당, 진지한 표정의 기마인물상, 당당한 고배, 기품이 느껴지는 백제 금동향로, 날아갈 듯 하늘하늘한 신라 금관의 인동 장식, 늘 흐뭇하고 낙천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하회탈과 동래탈,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삼매경에 잠겨있는 마애불과 미륵보살, 반가부좌 튼 채로 깊은 슬픔에 잠긴 부처, 신비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훨훨 하늘을 나는 선녀,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핑크빛 수련, 익살스런 까치호랑이, 꽃과 새가 한바탕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누리고 있는 화병들, 자신의 피멍든 가슴을 슬쩍 드러내 보여주는 석류란 놈, 하늘이 그리워 날개가 돋아난 물고기, 서로 희희낙락하며 수작을 주고받는 매와 호랑이…
어디 그것뿐인가? 최근에는 나팔형, 콘솔형, 포터블형으로 된 각종 축음기와 진공관 장전축까지 구해다 놓았다. 그 물건들에선 신기할 정도로 옛 가수들의 아련한 음향이 들려온다.
참으로 풍부한 고전적 전통적 소재들이 제각기 개별적 존재성으로 만나서 어울림의 대화엄(大華嚴)을 이룩한다. 모든 개체들은 오 화백이 인도하는 손길을 따라 화폭 속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가서 부드러운 하나로 화합하고 집중되며 일치한다. 오 화백은 최근 민화적 열정에 깊이 몰입되어 있다. 그가 수년 전부터 일관되게 추구하는 ‘한국의 멋’ 시리즈는 잠시도 집중을 흩트리지 아니하고 주변과의 조화, 여백이 주는 지혜, 삶의 통찰, 내면의 아름다움 따위를 추구하는 민족예술의 총체성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그 누가 민화를 단순장식화라고 말했던가. 오 화백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정겹게 만나게 되는 민화적 오브제들은 주로 연화(蓮花), 작호(雀虎), 주작(朱雀), 일월곤륜(日月崑崙), 토구(兎龜), 운룡(雲龍), 화조(花鳥), 송(松), 십장생(十長生), 불상 등이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들 삶에 보편적으로 깃들여 있는 애잔한 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항시 추구하는 장수(長壽), 승진, 다남(多男), 부귀공명, 남녀화합 따위와 고스란히 이어져 있는 길상(吉祥)의 통로이다.
우리가 오태환 화백의 민화풍 연작 속에서 만나게 되는 성과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절제된 자연미와 공간 활용이 주는 삶의 지혜로움이다. 그것은 마음을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기존 화법이 지니는 인식의 틀을 거부하는 창조적 표현의 길과 맞닿아 있다. 이 얼마나 우리의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놀라운 효과이자 비약(秘藥)인가.
일찍이 안견(安堅)은 환상적 꿈의 세계를 폭포처럼 경험하게 해주었고, 겸재(謙齋)는 조선이라는 국토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려 하였다. 단원(檀園)은 서민들의 소박한 풍속으로 파고 들어가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고, 혜원(蕙園)은 조선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안목의 변혁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오원(吾園)의 천재성은 밤하늘의 번개와도 같았다. 너무도 섬세한 필치로 삶의 일상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가르쳐준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손끝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사뭇 두근거리게 한다.
이제 나는 이 글의 말미에 이르러 감히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오태환 화백의 작품세계는 과거 떠돌이 부유적 삶으로 일생을 보내며 관청도화서 화가의 제도권 화풍과 그 틀에 박힌 투식을 과감하게 벗어나려 했던 민화 작가들의 투박하고도 강건한 화법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그의 화풍은 서민적 생활문화와 그 공간성이 빚어낸 가장 한국적이고도 전통적인 정서와 그 미학을 의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뜰한 시선으로 지켜보아야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오태환 화백에 의해 활화산의 분출처럼 강한 열기로 뿜어내는 민화풍 연작들은 현대 한국인들의 삶에서 점차 엷어져 가는 근원적 세계, 혹은 중심과 주체성에 관한 새로운 일깨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주는 민족문화사의 소중한 정신적 체험이라 하겠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물의 노래> 등 12권 발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5부작10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의 시작품을 발굴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을 발간하고, 문학사에 복원시킴. 각종 저서 40권 발간. 현재 영남대 국문과 교수 및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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