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6. 01:31ㆍ평문
역사속에 녹아든 시간의 원형질
2006-06-15 11:52:09 우길주
오태환 그림의 본질은 <역사의 두레박질>입니다.
그의 모든 그림들에 공통으로 각인된 관념은 <역사 속에 녹아든 시간의 원형질>이며 그의 작업은 그 낚시질의 의미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관념은 새삼스런 것은 아니지요. 더욱이 그 수단으로서 極寫實主義의 형식을 띠고 있는 그림들은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적 중심에 위치한 ‘밀레’나 여타 다른 현대의 화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평면적 사실주의와는 판이합니다.
오태환은 자연의 모방과 그것의 완벽히 이상화된 재현이라는 사실주의에서 나아가 그 위에 역사라는 압도적인 重量을 덧칠합니다. 우리는 그의 중량에서 역사의 또 다른 이미지들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지요. 인간의 존재가 그 무대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들이 엮어내는 전설화된 이야기들이 하늘을 가르고 울려오며, 그들의 생생한 날숨이 비린내처럼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입니다. 역사 속으로 발을 들이밀고 그들을 만나야 비로소 삶과 죽음, 인간의 의미와 가치, 영원과 꿈 등 정신의 여러 部面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언하지만 역사는 그런 부면들이 종합된 인간의 全面입니다. 역사를 그저 지나간 그림자로만 보는 시선은 삶의 의미를 외면하고, 나아가 현실의 감옥에서 허덕이게 하는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역사를 그러나 대개는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과 평면화된 화법으로 그저 ‘記述’ 수준에서 표현할 뿐이지요. 하지만 오태환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의 구사와 절묘한 기법으로 입체적인 역사의 두께를 나타냅니다. 그의 그림에서 역사가 당대의 화려한 옷을 걸치고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記述’이 아니라 이런 ‘보여줌’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 <보여주는 현실>로 연결하는 소재를 오화백은 이동순 교수님이 지적했듯이 古典 文物들에서 선택했습니다. 騎馬人像, 高杯, 瓦當, 토기, 수레바퀴, 鬼面瓦, 막새, 치미, 半跏思惟像 등은 역사를 표상하는 종합적인 트랜드지요. 흙쟁이들의 땀과 목수의 숨소리, 그리고 군인들의 함성이 그 고전 문물들에서 시간을 거슬러 울려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후대인들로 하여금 정신적 자양분과 삶의 윤기를 공급해주면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이 든든한 역사의 신뢰를 베풀어준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소재들을 이용하는 오화백의 탁월한 선택에서 먼저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그 기법의 절묘함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오화백이 처음 시도한 독자적 기법은 아니지만 평면적 極細密畵에서 잘 쓰지 않는 황토의 거칠고 우툴두툴한 입자를 화면에 뿌려대는 덧칠 기법은 거의 오화백 특유의 방법론으로까지 정착한 느낌입니다. 그것은 화면에 입체적 음영을 가감하여 역사의 굴곡을 새기고 나아가 무한한 상상력까지 부추깁니다. 우리는 그 완숙한 덧칠 기법에서 역사의 敍事性과 神話的 의미까지 건져올릴 수 있지요. 흔히 말하는 <역사가 배어있는 진상(reality)과 진실(truth)>을 이 기법은 훌륭하게 제 몫으로 다하고 있습니다. 만약 평면적 사실주의에 충실한 방법이라면 신묘한 재주는 인정할 수 있어도 진상과 진실에서 묻어나는 역사성을 얻기란 지난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 그런 진상과 진실을 얻는 가장 강력한 장치는 아무래도 화려한 채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그린 거의 모든 그림들에서 우리는 생동하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의 열쇠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현란한 황금 색감에서 거의 전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카메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깊이를 황토의 거친 입자에 섬세하게 입힌 색채들의 병치에서 마치 현실로 받아들이는 듯 한 착각을 얻게 하지요. 철저한 대상의 자기화를 거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날 그의 현란한 색감은 그 기법과 더하여 거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회화는 춤과 노래에 이은 또 다른 언어입니다. 오늘날 ‘토속성’과 ‘토템’ 분위기라는 역사의 두께를 말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는 토속과 토템을 보편적 언어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앞으로 더욱 많은 기대를 걸게 합니다. 그의 화필이 影幀이라든가 眞景 등속에까지 미치고 있음은 그 문물의 확대로서 기대를 갖게 합니다. 아마 탑이나 불상, 사천왕 등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진 문물에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로 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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