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3. 19:16ㆍ평문
고전 문물의 변용(變容)과 그 의미 오태환 작품의 예술성
이 동 순(문학평론가, 영남대 교수)
이 동 순(문학평론가, 영남대 교수)
밀양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 것은 순전히 오태환 화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차창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천은 완연한 봄빛을 머금고 있었다. 저 산등성이의 나무들은 혹독한 겨울바람을 모두 이겨내고 지금 틀림없이 봄의 성찬을 위한 준비에 분주할 것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대지는 수일 전에 내렸던 봄비를 잔뜩 머금은 채 초목들의 뿌리에 맑은 수분을 전달해 주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으리라. 뿌리는 이러한 대지의 뜻을 잘 알아듣고 보통 때보다 더욱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쁠 것이다. 사람들은 봄의 여러 수목들 중에도 유독 많은 물을 길어 올리는 고로쇠나무를 찾아내어 등걸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파이프를 박아서 저 아래쪽 마을로 고로쇠 물을 흘려보내도록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무의 수분을 가로채는 인간의 행위에 불과하다. 영문도 모르고 몸에 좋다고 마셨던 들쿠레한 고로쇠물은 기실 나무의 혈액이 아니었던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차는 어느덧 청도를 단숨에 통과하고 미구에 밀양역으로 다가간다.
밀양은 내가 살고 있는 경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다만 지역의 경계가 경상도의 남북으로 나뉘는 지점에 있어서 공연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생각해온 경향은 있었다. 이 밀양 언저리를 나는 자주 가보지 못했다. 단지 밀양에서 가까운 표충사와 그 뒤편의 재약산 사자평을 오르기 위해 수차례 방문한 바 있으나 정작 밀양시내로는 진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그 밀양의 도심을 찾아가려 한다. 밀양 역에는 이미 옛 가요를 사랑하는 우리의 다정한 벗들이 경향각지에서 찾아와 모여 있다. 그 낯익은 얼굴들 가운데서 나는 얼굴이 희뽀얗고 귀인스러운 용모를 가진 한 분을 만났다. 그가 바로 밀양 화단의 터주인 오태환 화백이다.
역에 내려서 둘러본 밀양의 인상은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먼저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으며, 중소도시 특유의 한산함이 너무도 종요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 화백의 자동차를 타고 그의 일터이자 가정인 동방화랑으로 갔다. 밀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밀양강이 바로 지척에 있어서 맞은 편 등성이에서 대숲을 쓸고 불어오는 바람이 봄의 훈기를 잔뜩 머금었다. 적절한 넓이의 화랑은 오 화백의 작업실로서 그간 묵묵히 예술적 창조의 길에서 산출해낸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팜플렛을 받아서 자세히 읽어보았더니 1984년 이래로 이미 다섯 차례의 개인전, 초대전을 포함한 통산 60여회의 전시회를 가진 바 있는 중진 화가이다. 제20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즉 국전에서 입상 경력이 있는 실력파이기도 했다. 나는 찬찬히 팜플렛과 화랑의 캔버스에 올려져 있는 실제작품들을 대조해 보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하였다.
오태환 화백의 작품들은 일종의 연작 형태로서 ‘한국의 멋’이란 시리즈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지닌 표현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작품명을 들어보면 <정기>란 제목으로 제작한 두 점의 대작을 비롯하여 <불(佛)1> <불(佛)2> <봄의 향기> <향(香)> <흔적> <풍요> 등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이런 작품 스타일에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오태환 화백의 취향과 관점, 방법론등에 관한 암시이다.그의 취향은기본적으로 민족적 역사적인테마에서 소재를 찾고 있다. 이를테면 신라의 기마인상(騎馬人像), 고배(高杯), 와당(瓦當), 토기, 수레의 바퀴, 귀면와(鬼面瓦), 숫막새, 암막새, 용두형(龍頭形) 치미, 화려한 금관 장식, 마애불, 미륵불, 관음보살, 약사여래불,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등의 각종 불상, 밀양의 영남루, 나무 구유통과 한 말 들이 쌀되, 향로, 백자 항아리, 엽전 등속이 오태환 작품의 중심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멋-정기. 162.1×112.1㎝. 혼합재료. 2001>은 가장 대작이면서 동시에 고전적 화려함과 엄숙성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다.
나는 오태환 그림의 재료를 처리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미세한 황토분말과 흙을 이용하여 색채의 질감이 재현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작가의 성실한 추구가 느껴졌다. 실제로 화랑의 한쪽 구석에는 곱게 체로 친 황토의 분말이 종이 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원형의 빛깔에 충실하고자 하나 그러한 작업이 단순성에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새로운 변용으로 방법론의 극복을 꾀하는 작가의 노력은 고결하게 느껴졌다.
오태환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심을 형성하는 색채는 황토의 빛깔이다. 황토! 이것은 얼마나 거룩한 우리 민족의 본질을 담아내고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우리 민족은 태어났고, 이곳에서 살다가 우리는 묻혔다. 그러므로 황토는 우리 겨레의 몸 그 자체인 것이다. 이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농산물과 수산물의 근원은 바로 황토이다. 최근 황토에 대한 애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세태는 그만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토에 대한 애착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며, 토착성과 보편성을 사랑해온 한 예술가의 지속적 관심의 소산이다. 우리가 오태환 화백의 작품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갖게 되는 까닭도 바로 이런점에 연유한다.
오태환이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한국인의 고전적 문물세계는 언제나 후대인들로 하여금 정신적 자양분과 삶의 윤기를 공급해 주면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이 우리에게 든든한 역사의 신뢰를 베풀어준다. 본래 고전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고전적 소재에서 즐겨 작품의 테마와 정신적 질료를 구하려는 오태환의 추구는 그 작업의 성격 자체가 어느 틈에 고전적 시간성을 슬그머니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오태환의 작품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배치의 미학과 조화로움의 성취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모든 소재들을 평면적 구성으로 한정하지 않고 현저히 상이한 이질적 존재를 하나의 화폭 속에서 배합하여 절묘한 효과를 거두어 내고 있다. 마치 대상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소재들은 자연스러운 조화의 세계를 형성한다.
민족적 역사적 소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영정 제작 활동으로 이어졌다. 박위, 허준, 아랑, 사명대사 등과 최근의 박시춘 등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들은 어김없이 작가의 터치를 거쳐서 작품화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강한 긴장과 자극을 부여하기 위해 음악과 주변 예술 장르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이해의 경험을 가지려 한다. 그러한 활동은 거의 대부분 대중적 삶에 대한 애착과 연민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작품 활동에 놀라운 변용으로 재구성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나타내 보인다. 한 지역에서 지역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소화시키는 듬직한 예술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밀양 지역민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인 것인가. 이제 오태환은 지역성의 의미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에게 민족문화사적 긍지로 점차 친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예술가의 성실한 붓끝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팽팽한 긴장 속에서 운필(運筆) 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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