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곡가 (1) - 이재호, 이봉조

2023. 8. 18. 10:42가요이야기

 

불멸의 작곡가 (1) - 이재호, 이봉조   

대중가요에서 그 이름을 빛낸 스타들은 시대를 거슬러 우리의 삶과 함께 합니다. 우리 가요사가 100여년을 헤아리지만 아직까지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스타들이 많습니다. '희망가', '황성옛터' 등은 세상에 나온지 70년이 넘었지만 흘러간 가요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생명입니다. 남인수, 이난영, 김정구, 황금심, 현인 등 이미 세상을 등진 스타들의 이름 또한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가수들의 이름만큼이나 중요하지만 흔히 잘 모르고 지나가는 무대 뒷편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로 작사, 작곡가들의 이름입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노랫말과 대중들의 정서를 아우르는 곡을 쓰지만 알려진 몇명 정도를 제외하곤 정작 자신들은 한걸음 물러나서 대중들에게 쉽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대중가요사를 심도있게 다룬 변변한 책 한권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 이들을 알 기회가 더욱 멀어진 것 또한 아쉽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에는 작곡가를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보다 심도있게 다루었으면 하는 욕심은 많지만 우선 간단한 소

개로만 그치고 차츰 심도있는 접근의 기회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소개하는 작곡가는 이재호와 이봉조입니다. 진주MBC '추억의 가요'와 함께하는 이유로 진주출신의 걸출한 작곡가 두사람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재호는 1938년 리갈, 콜럼비아, 태평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태평레코드의 중추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았습니다. 40년대초 작은 규모의 태평레코드가 가장 큰 규모의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소속된 가수 몇사람이 타 레코드 회사의 여러사람의 가수가 발표하는 수십장의 레코드보다 더 큰 판매량을 보였기 때문이며, 태평레코드사에서 이 곡들의 작곡을 대부분 이재호가 담당하였습니다.

오케레코드에 박시춘, 남인수 콤비가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였다면 이에 반해 태평레코드에서는 이재호, 백년설 콤비가 있었으며 40년대 초에 연이어 스타로 성장하는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등이 모두 태평레코드에서 이재호의 곡을 받아 데뷔, 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후 진방남(반야월)이 작사가로 변신하면서 이재호와 콤비를 이뤄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인연도 태평레코드와 관계가 있음.

* 이재호는 동시기에 활동하던 박시춘, 손목인 등과 더불어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으며 세사람 모두 광복이후 60년대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1. 나그네 설움 / 백년설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1940년)

광복이전 최고의 판매고(10만장)를 올린 히트곡. 불과 1년전(39년)에 데뷔한 백년설이 당대 최고의 가수인 채규엽, 남인수를 일시 능가할 만큼 인기를 얻게된 곡으로, 작은 규모의 레코드 회사인 태평레코드의 이재호, 백년설의 콤비(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는 가장 규모가 크던 오케레코드의 남인수, 박시춘 콤비에 필적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받아 오케레코드는 물밑 작업을 통해 벌금과 제약을 모두 감수하면서 당대 최고의 전속금을 지불하고 41년 백년설을 스카웃하였다.

2. 산유화 / 남인수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2)

동향인 진주출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광복이전에는 인연이 없던 두사람이 만나서 빚은 가요사상 최고의 명곡 중 하나. 가수 진방남에서 작사가로 입지를 일군 반야월이 소월의 시에서 차용한 듯한 노랫말을 짓고, 최고의 작곡가 이재호가 3박자의 왈츠로 완성도 높은 곡을 만들었다. 더구나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클래식 창법으로 절창하여 명곡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3. 경상도 아가씨 / 박재홍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1953)

6.25라는 참담한 전쟁의 와중에서 부산은 피난민들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판자집과 국제시장에는 하루를 연명하는 피난민들의 몸부림이 넘쳤고 그 속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은 싹텄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가요 중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등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 하나다. 박재홍은 40년대 말에 “울고 넘는 박달재”로 인기를 얻으며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백년설과 비슷한 음색으로 인하여 백년설의 히트곡을 여러곡 재취입하기도 하였다.

4. 울어라 기타줄아 / 손인호 (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1957)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은 많고 더불어 사람사는 곳에 역시 슬픈 사랑의 역사도 이어진다. 손인호는 처음에 레코드 녹음기사로 출발하였으나 가수로 데뷔한 이후 “비 내리는 호남선”, “하룻밤 풋사랑”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5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동시기에 안다성, 방운아, 명국환, 유춘산, 원방현, 허민 등이 신인가수로 등장하엿다.

5. 단장의 미아리고개 / 이해연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6)

1.4후퇴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돌아오니,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던 부인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었고 차녀 수라(당시 6세)양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해 숨져 입은 옷 그대로 언땅에 묻어야 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작사가 반야월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해연은 41년에 데뷔하여 “뗏목 이천리”, “소주 뱃사공” 등의 노래를 부르며 43년에 발표된 인기유행가수 군상(조광 1943년 5월호)에 언급된 열네명에 속할 만큼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데뷔 15년이 지난후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인하여 다시금 히트가수로 각인되었다.

6. 불효자는 웁니다 / 진방남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1940)

가수로서 진방남의 최고 히트곡이다. 작사가 반야월로 활동하기 전의 가수로서의 예명이 진방남이며 본명은 박창오다. 39년 조선일보 감천지국 가요콩쿨에서 1등으로 당선하여 태평레코드에서 백년설과 같은 해(39년)에 데뷔하였다. 42년 “넋두리 이십년”을 처음으로 가사를 만든 이후 한국 가요사상 가장 많은 삼천여곡의 가사를 만들었다. 이재호와 콤비로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7. 갈매기 쌍쌍 / 백난아 (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1940)

백난아는 태평레코드에서 주최한 전국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에 “오동동 극단”으로 데뷔하였다. 역시 43년 발행된 “조광” 5월호에 언급된 인기유행가수에 속하였으며, 이는 같은 회사(태평레코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백년설, 진방남과 더불어 한때 오케레코드를 맹추격하던 태평레코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의 태평의 중추적인 작곡가는 이재호였으며 대부분의 히트곡이 그의 작품이다.

8. 산장의 여인 / 권혜경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957)

“호반의 벤치”, “첫사랑의 화원”, “산장의 여인”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60년대까지 풍미한 권혜경의 대표곡이다. 노랫말처럼 슬픈 삶을 살았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곡이다.

 

[ 이봉조 작곡 특선 10 ]

1. 떠날때는 말없이 / 현미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1964

이봉조의 대표곡면서 그의 음악적 배필이자, 현실에서도 부부로 연을 맺은 현미의 출세곡이다. 한명숙과 더불어 미 8군 무대출신의 허스키 보이스인 현미를 스타로 만들어준 곡이다. 대부분의 이봉조 곡이 시대를 거슬러 당대의 스타들이 즐겨 재취입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음악적 성취때문일 것이다. 이봉조의 거의 모든 곡이 수많은 스타들에 의하여 재취입되었지만 이 곡처럼 많은 가수들이 정규앨범에서 앞다투어 부른 곡 또한 많지 않다. 현미의 취입이래로 정훈희, 김상희, 문주란, 이은하, 최백호, 최진희는 물론 포크가수인 양희은, 박인희, 이광조, 버들피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불러보고 싶은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2. 안개 / 정훈희 (박현 작사, 이봉조 작곡, 1967)

정훈희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수많은 작곡가와 가수가 콤비를 이뤄 최상의 곡을 히트시킨 전례가 많다. 박시춘, 남인수가 그렇고 이재호, 백년설이 그렇듯이 이봉조 또한 정훈희와 함께 많은 곡을 히트 시켰다. 더불어 국제가요제 스타로서 최초의 국제가요제 출전(동경국제가요제,1970) 및 칠레 국제가요제(1979) 최우수 가창상(꽃밭에서)등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봉조의 곡으로 정훈희의 대표곡은 “안개”, “꽃밭에서”가 있다.

3. 별(My Star) / 김세환 (이봉조 작사, 작곡, 1971)

이봉조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는 아무래도 그의 부인인 현미일 것이다. 이봉조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물론 부부로서의 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곡은 또한 당대의 포크가수 스타인 김세환이 재취입하여 한껏 맛깔을 더했다.

4. 보고 싶은 얼굴 / 최백호 (현암 작사, 이봉조 작곡, 1964)

현미의 목소리로 64년에 발표하여 히트한 곡을 낭만적인 허스키 보이스 최백호가 첫독집(2집, 1977)에서 재취입하여 다시 히트한 곡으로 이후에는 최백호의 대표곡으로 각인된 노래다.

5. 철없는 아내 / 차중락 (이성재 작사, 이봉조 작곡, 1967)

60년대 후반 팬들의 인기를 배호와 함께 양분한 차중락의 히트곡이다.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키보이스의 보컬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사랑의 종말”과 함께 이봉조가 작곡한 차중락의 대표곡이다. 차중락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이라 한다. 또한 차중락 사후에 사촌형 차도균이 다시 불러 재히트하였다.

6. 사랑의 종말 / 박경애 (이성재 작사, 이봉조 작곡, 1967)

엘비스의 곡을 번안하여 부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과 함께 차중락 최고의 히트곡이다. 이를 70년대 여성듀엣 “산이슬”에서 독립한 박경애가 3집(1980)에서 다시 불러 히트하였다. 차중락의 팝적인 창법과는 다른 보다 허스키하고 여성적인 감성을 더하여 색다른 맛을 내고 있다.

7. 종점 / 최희준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1966)

60년대 중후반이 가수로서 최희준의 독주시대였다면 작곡가로서는 이봉조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현미를 비롯한 최희준, 차중락, 정훈희 등이 모두 이봉조의 곡을 받아 히트하였고 스타로서 성장하였다. 이봉조의 곡으로 최희준이 히트한 곡은 “맨발의 청춘”, “종점”이 있다.

8. 웃는 얼굴 다정해도 / 윤복희 (현암 작사, 이봉조 작곡, 1967)

1946년생인 윤복희의 데뷔곡이다. 아버지 윤부길, 어머니 고향선, 오빠 윤항기 등 모두가 당대의 최고 스타인 음악가족이다. 대중가수로서의 인기는 물론 미니스커트 열풍, 당대 남자 톱가수인 유주용, 남진 등과의 결혼으로 인한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1997년에는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뮤지컬 배우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9. 못생 겨서 죄송합니다 / 이주일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1980)

본명이 정주일인 코메디언 이주일. 20여년의 무명생활끝에 나이 40이 되던 1980년 2월에 TBC-TV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지 꼭 2주일만에 스타가 됐다고 해서 원래 쓰던 “주일”이라는 예명 대신에 “이주일”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80년 2월에 텔레비전 데뷔해서 6월에 이 음반을 냈으니 얼마나 급속도로 스타가 됐었는지 짐작된다. 코메디언으로서는 최초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정치판에서 실망한 후 “4년동안 코메디 잘 배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 말년에는 독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자신 또한 폐암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등졌다.

10. 무인도 / 김추자 (이종택 작사, 이봉조 작곡, 1975)

김추자는 신중현에 의해서 픽업된 사이키델릭 가수였다. 펄시스터즈 이후로 김추자를 영입한 신중현은 그의 파워풀한 가창력과 터질듯한 율동에 신들린 듯한 연주를 더하여 69년 데뷔음반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늦기 전에”를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성장시켰다. 김추자는 71년까지 데뷔 2년남짓에 12장의 음반을 발표할 만큼 바쁜 생활을 보내면서 인기와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이 곡은 이봉조의 곡을 중심으로 75년에 발표한 “무인도”를 타이틀로 한 음반(무인도 - 이봉조 작곡집)에 수록되었다. 김추자는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 후 두문불출하다 78년 대한극장에서 재기 리싸이틀을 열었으나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무인도”로 75년 정훈희가 칠레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3위에 입상하였으며, 당시 대통령이던 피노체트에게 축하화환을 선물받아 뉴스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