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유성기음반제작사 열전 (4) - 럭키레코드

2023. 7. 26. 23:45가요이야기

광복 이후 유성기음반제작사 열전 (4) - 럭키레코드  글 : 이준희

1945년에서 1950년 사이 한국 대중가요사를 대표할 만한 히트곡을 단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단연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신라의 달밤> 음반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재미를 본, 즉 <신라의 달밤>을 발매한 음반회사가 바로 럭키레코드이다.

앞서 본 오케레코드와 마찬가지로, 럭키레코드 역시 광복 이전에 같은 이름의 음반회사가 있기는 했으나, 그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광복 이후에 새로 설립된 음반회사이다. 럭키레코드의 설립 시점에 대해서는 1946년, 1947년, 1948년 등 다양한 증언이 있지만, <신라의 달밤>을 비롯한 제1회 신보가 발매된 것은 1949년 4월이었다.

음반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할 때 첫 음반이 나오기 전인 1948년 무렵에 이미 럭키레코드가 설립되어 있었을 것은 분명하나, 설립 시점이 과연 1946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1950년 5월에 나온 광고에서는 ‘창립 1주년’ 운운하고 있기도 하므로, 럭키레코드의 설립 시점은 첫 음반이 나온 때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레코드를 설립한 사람은 명동에서 큰 일본음식점을 경영하던 강운용(기록에 따라 강운룡, 강운영이라 하기도 한다)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곡가 박시춘이 실제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럭키레코드의 설립 경위에 대한 박시춘의 증언을 보면, 일제시대 오케레코드를 운영한 이철의 매부이자 오케레코드 중역으로 활동한 김성흠을 찾아가 음반 제작에 필요한 기술과 설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흠은 오케레코드의 모회사였던 일본 데이치쿠레코드에서 음반 제작 기술을 습득한 바 있다.

1949년 6월 무렵에 사옥을 명동(현재 롯데백화점 맞은편인 예전 코스모스백화점 자리로 알려져 있다)으로 옮겨 설치한 럭키레코드의 녹음실은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설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녹음설비와 현인이라는 걸출한 신인가수를 보유한 럭키레코드는 <신라의 달밤>을 필두로 한 대중가요 인기곡들을 연달아 발표하여 6.25 이전에 존재했던 음반회사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49년 4월부터 1950년 6월까지 럭키레코드에서 발매한 것으로 현재 확인되는 음반은 음반번호 L7700부터 L7712까지 13장이며, 수록된 곡은 모두 26곡이다. 이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을 대강 들어 보아도, <신라의 달밤>, <청춘블루스>, <추억의 꽃다발>, <낭낭 십팔세>, <금박댕기>, <베사메무쵸(남국의 처녀)>, <럭키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여인애가>, <선죽교>, <약산 진달래>, <고향만리>, <애수의 네온가>, <애정산맥>, <서울야곡> 등 절반이 넘는다. 확률적으로 보아 대단히 놀라운 성공률이 아닐 수 없다.

 

럭키레코드 음반은 L7712 이후에도 몇 장이 더 발매되었는데, 시기적으로 L7712까지와 연속이 되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블루스>와 <인도의 향불>이 수록된 L7713 음반부터는 음반딱지 디자인이 그 전과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작가로 작사가 손로원, 작곡가 전오승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던 음반 발매가 전쟁 중에 다시 일시적으로 재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럭키레코드 이름으로 발매된 음반은 6.25 이후에도 SP나 LP로 등장한다. 그러나, 6.25 이후 럭키레코드가 1949년부터 음반 발매를 시작한 럭키레코드와 같은 회사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정황상 같은 회사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기는 하나,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