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유성기음반제작사 열전 (2) - 오케레코드

2023. 7. 26. 23:31가요이야기

광복 이후 유성기음반제작사 열전 (2) - 오케레코드                           글 : 이준희

일제시대 대형 음반회사로는 콜럼비아, 오케, 빅타, 포리돌, 태평 등 다섯 군데가 있어 1943년까지 음반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오케레코드는 5대 음반회사 가운데 가장 늦게 1933년부터 음반을 내기 시작했지만, 음반 발매 종수에서 콜럼비아레코드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대중가요 분야에서는 다른 음반회사들을 압도하여, 인기 있는 작가와 가수, 작품 태반이 오케레코드를 통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케레코드의 화려한 활동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오케레코드의 본사인 일본 데이치쿠(帝蓄)레코드가 철수하면서 일단 막을 내렸지만, 오케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 한국 음반산업의 전설적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1948년에 오케레코드가 새롭게 부활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롭게 부활한 오케레코드는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와 이름이 같고 음반상표도 유사하지만, 실질적인 계승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오케레코드의 설립 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나,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의 간판급 작가, 가수였던 조명암, 김해송, 이난영, 장세정 등이 참여했던 것은 분명하다. 김홍련이라는 인물이 창설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오케레코드의 부활을 알린 첫 번째 작품은 1948년 5월에 발매된 <울어라 은방울> 

<세월은 간다>였다. 음반번호가 8151이었던 것은 8.15 광복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첫 음반의 뒤를 이어 음반번호 8153으로 <달밤 그리워>, <향수마차> 같은 곡이 발매된 것으로 보아, 815* 번호체계로 나온 음반이 다소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대부분의 오케레코드 음반에는 음반번호가 제대로 표기되어 있지 않아 오케레코드의 발매 규모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 음반을 복제해 낸 <선창>, <배표를 사 들고> 등은 원반의 녹음번호를 표기해 발매하기도 했다. 1940년대 말에 오케레코드에서 나온 인기곡으로는 송민숙(=송민도)의 <고향초>, 박재홍과 옥두옥이 함께 부른 <눈물의 오리정>, 남인수의 <몽고의 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몽고의 밤>은 오케레코드에서 음반번호 없이 <아득한 저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음반도 있고, 뉴오케라는 상표에 음반번호 N4001로 발매된 것도 있어, 두 가지 음반의 관계를 아직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보다 확충되어야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오케레코드가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6.25 이후까지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음반이 나온 것은 분명하다. 6.25전쟁 때 월남했다는 작곡가 전오승의 작품 <서울부기>, <서울의 거리> 등이 오케 상표로 발매되었고, 원방일(원방현?)의 <청춘 하이킹>과 박경원의 <자유부인>이 음반번호 258, 264로 발매된 예도 확인된다. 다만, 6.25전쟁 이후 오케레코드가 <울어라 은방울>을 발매한 오케레코드와 그대로 맥이 이어지는 곳이라고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1956년에 간행된 <<전국주요기업체명감>>과 1958년에 간행된 <<전국기업체총람>>에는 이효익이라는 사람이 대표로 있는 오케레코드제작회사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서울 남산동에 있었다는 이 회사와 1948년에 새로 등장한 오케레코드, 6.25전쟁 이후 음반을 발매한 오케레코드 세 곳이 관계가 있는지 여부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 등은 앞으로 계속 조사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