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남인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2023. 7. 17. 14:24가요이야기

 

 


 

    

      

남편 남인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김은하

 

* 아래 글은 잡지 '주부생활' 1958년 3월호에 실린 것으로 원문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957년에 있었던 고복수 은퇴공연 이후 남인수-이난영 두 사람의 관계가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하자 김은하여사가 이러한 글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남인수팬클럽 회보 제4호

나는 좀처럼 거리에 나가지 않는다. 그런 탓으로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음에는 다방에도 제법 나와서 앉게 된 것은 다른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남편과 이씨(이난영)와의 새살림 운운으로 세상이 다 알게 된 탓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끌고 나와서는 제각기 딴에는 위로라도 해준다는 고마운 마음씨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내라는 두 글짜가 겪어야 할 고통.... 크고 작은 약간의 차이는 있을망정 한번은 아니 나의 경우에는 수백 번을 겪은 것 같은 고달픔이 이제는 체념에 가깝게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생활 18년이라는 역사를 통하여 나의 남편을 완전히 알고 있는 탓으로 세상이 아무리 뒤숭숭하게 떠들어 대도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올 것을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속담에 이 일에는 부처님도 돌아앉는다고 전해져 오는데 나는 태연자약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실은 아니다.

 무희생활을 내던진 나의 참사랑

경남 마산에서 나는 자라났다. 아버지는 몹씨 엄격하였고 3.1운동 당시 경남대표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몸바친 분이다.어릴 때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항상 나를 가르켜 아버님을 많이 닮았다고 하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어쩌면 성미까지 아버님을 닮았는지 모른다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말이다.

좀처럼 나는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속으로 결심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에 옮기고야 만다. 그래서 가끔 나의 남편은 나를 '고집쟁이'라고 부른다.

처음에 무용공부를 시작할 때 부모님들이 몹씨 반대했었다. 그러나 나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으며 일본에 건너가서 꾸준히 무용공부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화려한 무용가로서 살아갈 것을 그려 보면서 무대를 동경하였다. 집에서는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서둘렀지만 결혼 같은 것은 안 해도 괜찮다고 속으로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팬레타-'가 들어오고 사진까지 보내 달라는 애절한 부탁편지가 날아 들어 왔다. 그것은 한번씩 공연을 마치면 으레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또 다른 각도로 나를 끌고 갔으니 그것은 지금의 나의 남편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남편은 가수, 나는 무희. 예술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공통된 마음이 통하기 전에 남성 대 여성으로서 우리들은 첫눈에 서로의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러한 기적적이며 신비스러운 남녀교제는 그리 흔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심장이 하나 있드시 참사랑도 단 한번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마치 나의 경우를 가리켜서 한 말 같이 생각된다. 그 당시의 황홀함과 즐거움은 청춘을 노래부르게 하였으며 서슴치 않고 깨끗한 교제를 통하여 결혼에까지 '스므-스'하게 '꼴잉'되었던 것이다.

남편의 고향은 진주. 시댁에서는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나의 남편은 '오-케 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이었다.

이리하여 한때 꿈꾸던 무희생활을 헌 신짝 같이 던져버리고 행복스러운 신혼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우리들의 결혼식날 1939년 4월 7일.진주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 같고 봄 만난 꽃동산은 우리들의 기쁨을 수놓아 주었던 것이다.

부부 동반하여 공연도 하고 생활은 남편의 보수로 넉넉히 살 수 있었다.결혼한 지 4년이 지나도록 우리들에겐 어린애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신혼기가 오래 계속된 셈이며 신혼여행을 겸하여 지방공연도 다니면서 부부가 한 무대에 나섰던 것이다.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일본을 위시하여 북지로 해서 안 가본 곳이 별로 없다.

이 때 에는 마치 부부라기보다 친구와 같은 감이었고 서로의 눈빛으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임을 고백하고 있었다.

한참 사랑에 도취된 그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공연을 다니면서 연일 무대에 나서다시피 하면서도 나의 남편은 조금도 고단한 빛이 없었다.

그 때 내가 위가 나빠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남편은 삼을 어데서 사다가 손수 대려서 나에게 권하던 일이 생각난다.

밤잠도 잊다시피 하며 즐거운 얼굴로 약을 정성스럽게 대리곤 하였다. 나의 남편은 성격이 몹씨 '데리케트'해서 잔 인정이 많다. 얼마나 즐거웠던 신혼 당시인지 모른다.

그 당시에 찍은 앨범을 뒤적거리기만 해도 내 마음은 자연이 즐거워지면서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깃든다.

같이 앉아서 보고 있던 큰 딸 명자는

"엄마 뭐가 웃으워?"

"사진이 웃읍지 뭐가 우서워"

하고 어물어물해 버리지만 단 한번 있었던 나의 황금시대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남편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가벼워질 줄 모르고 여기저기에서 남편의 '스캰달' 운운이 있을 때마다 나는 괴로워한다.

 비교적 여자들이 따르는 남편

가수라는 직업이 하나의 화려한 직업이기도 하지만 항상 여자들이 따르는 형편이다.

그것은 얼굴이 잘났다던가 또는 어떤 묘한 전술을 쓴다던가 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인간성이 퍽 인정이 많고 또한 독신으로 자라난 탓으로 퍽 고독감에 사로잡히는 순간도 있고 한데 이것이 그만 그의 인간성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격이 모든 면에서 치밀하기 때문에 잔 인정이 많다.

웬만한 남성들이 무관심하고 무신경한 일에 나의 남편은 신경을 쓰고 또한 동정하다 보면 상대방의 여성들은 요런 세세한 감정에 감탄하고 넋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몰지각하게 덤벼든다. 이것을 용단성 있게 뿌리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 아닐까.

이러한 요소들이 항상 꼬리를 물고 다니다 보면 가정을 한동안 비우게 한다. 처음에 당할 때는 속이 끓고 남의 일 같기도 하고 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 헤아려 본다면 수억 밤이나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운 것 같다.

잠을 청하다가도 이 순간에 내 남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이 들기만 하면 잠이 밤새도록 오지 않으며 공상의 날개를 달고 방황하기가 일쑤이다.

그래도 결코 오래 가지 못하여 다시 남편은 자기의 잘못을 빌고 있으며 원상복구를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제하는 동안에 여성편에서 물러나가는 법은 결코 없다. 반드시 남편이 먼저 툭툭 털고 일어나지 않는 한 여성측에서는 물러나갈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선천적으로 여복, 좋게 말해서 타고난 남성이라고 보아 줄까.

어차피 여성들을 끌고 다니는 지남석이 붙어 있지는 않기를 아내 된 나로서는 바라는 바이지만 비슷한 무엇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상 싶다.

석 달 이상은 가지 않을 터 이제는 남편의 눈치가 달라지면 나는 옛날 같이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당신 요새 또 눈치가 이상해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한번 같이 만나보도록 해요."

이런 대화가 교환이 된다. 그러면 나는 상대방의 여자를 만나보고야 만다. 그래서 이 여자는 며칠짜리라던가 또는 몇 달짜리 등으로 내 딴에는 규정을 지어 버린다.

그러면 틀림이 없이 그렇게 못 가서 헤어지고 마는 것이다.

남성들은 이상하다. 처음에는 한 여성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다가 나중에는 반드시 자기의 아내와 비교를 하게 된다.

그래서는 아내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면 그만 가정이 그리워지면서 아내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이다.

나의 남편 경우를 생각해 보드라도 이제까지 헤아릴 수 없이 나의 속을 태우며 밤잠을 이룰 수 없게 하였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집을 비운 예는 없다.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

가정에서는 맏딸 명자(明子, 열세 살)와 열 한 살짜리의 명주(明珠)가 있다.

그리고 맏아들로 일곱 살짜리 대우(大祐)와 세 살짜리 대익(大翼)이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들이라 모습이 꼭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남편은 어린 것들을 퍽 귀애하고 있으며 어느 가정 못지않게 가정에서는 어린이를 위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

잠시도 잠잠할 때가 없을 정도로 애들에게 노래 가르치기에 열중한다. 그야말로 가족음악회가 벌어지는 것이다. 큰 딸에도 제법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 공부를 열심히 한다.

피를 받은 탓이리라 생각하고 그다지 만류하지는 않는다.

보통 괄괄한 여성 이상으로 남편은 섬세하지만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은 별로 잔소리가 없다.

그것은 내 자신의 성격이 남편은 따르지도 못할 정도로 무섭게 깔끔하고 섬세한 탓으로 불만을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결코 내 자랑이 아니라 나의 성격인 탓이다.

독서도 하고 어린이들의 시중들기도 하고 아주 원만한 가장으로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앞날을 설계하고 어린이들의 장래를 이야기하면서 웃음의 꽃이 핀다.

"오래도록 살아오지만 당신의 결점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수"

늘 뇌까리는 남편의 말이다.

"왜 있지 않아요?"

"아니 무언지 말해 봐. 나는 모르겠는데"

그러면 나는 서슴치 않고 "고집쟁이"하면 남편은 악의 없는 웃음을 웃어 버리고 만다.

남편의 성격으로 보아서 싫은 억지 생활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인품이다.

아무리 어린 것들이 매달리고 세상이 고함을 지르면서 으르렁대어도 절대로 자신이 싫으면 하루도 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빤한 일이다. 오랫동안의 생활을 통하여 얻어진 하나의 결론인 것이다.

그러나 절대 나의 남편의 경우에는 가정이 항상 자랑거리이며 움직일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랑의 보금자리라는 인식을 뿌리 깊게 박혀져 있다.

때때로 있을 수 있는 일들. 그리고 세상의 남편들이 어찌 외도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여성잡지에서는 남편의 외도 방지법이니 무슨 비결이니 하지만 나의 견지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싫건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는다.

하고 싶은 마음을 꼭 가진 남편에게 어떤 비결도 방법도 그다지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기쁨을 맛 봄 으로서 거기에 따르는 고통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던 것이다.

그런 탓으로 나는 이제는 그다지 초조하게 굴지 않으며 그저 담배 연기나 내뿜으면서 타는 속을 가라 앉히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만약 어린 것들만 없다면, 하고 생각할 때 결코 지금 내 자신의 덤덤한 자세는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는다.

그것은 나도 기분이 있으며 좋은 것 나쁜 것 알고 얼마던지 멋지게 세상을 '엔조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위로로 삼을 수 있는 무기는 될 수 있을망정 일을 올바르게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4남매의 어린 생명이 나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죄 없는 맑은 눈동자로 무엇인가 말해주고 있는 상싶다.

이런 말 없는 힘이 나늘 오늘날까지 별일 없이 살 수 있게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너무도 황홀했던 젊은 날의 추억.

그리고 가정에서의 남편은 믿음직한 언동이 쇠사슬로 꼭 얽혀 놓아 두는 듯이 나의 가냘픈 몸둥아리를 매어 놓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이 집안을 위해 퍽 다행한 노릇이라고 본다.

 부부는 서로 좋은 점을 보아야

남녀가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결점이 없는 인간이란 완전무결한 인간을 말하겠는데 어데 완전무결한 인간이 있을 수가 있을까 생각는다.

아무리 다정하고 모범적인 가정의 부부라고 하드라도 결코 두 부부의 단점이 없는 경우는 별로이 없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의 단점을 가지고 시비를 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서로의 좋은 점을 생각하면서 이해를 해야만 그 가정의 현상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위기를 면할 수가 있다고 본다.

나의 남편은 몸이 퍽 약하다. 그래서 가정에 돌아왔을 때 결코 항상 건강한 몸으로 있지를 못했다.

병고로 신음하기가 일수이고 남편의 병간호에 나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몸이라도 건강해서 나의 마음껏 즐기며 온 집안이 봄날을 맞은 듯이 항상 기쁘기만 해도 좋겠다.

아픈 사람 시중하다 나면 시일은 가 버리고 회복이 되었을 때는 또 다른 여자 품에 안기어야 하니 이렇게 딱한 노릇도 별로이 없겠다. 이것이 그의 단점이라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이것은 하늘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나는 별로이 믿는 데도 없다. 그러나 굳은 나의 신념을 믿고 산다. 이것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천적이 성품이라고 본다.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나의 남편의 말이다. 그의 가정에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며 그의 몸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나는 돌아올 것이니 당신이 좀 괴로운 대로 참아야지...한때 아편을 하던 이란영씨도 이제는 완전히 아편을 떼었으며 건강상태가 퍽 좋아졋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건강이 좋아지고 남편 없는 가정의 질서가 잡히면 나는 곧 돌아갈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 없는 고로 나는 나 대로 내가 할 도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란영씨만 해도 서로 언니! 언니 하고 있는 사이이며 모르는 처지가 아닌데 도저히 서로가 반목시해서 눈을 붉으락푸르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자란 언제든지 가정을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무슨 수학의 정리 같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가정을 버리고 내 기분에서 행동하기를 꺼리끼고 있으며 삼가고 있는 형편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여자 된 원 도리를 벗어나지 않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고 있다.

순간을 못 참겠다고 나가서 무작정하게 덤비면 그 때에는 마지막 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희생은 그다지 애석하지 않다고 해도 어린 것들의 고운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해서야 될 일이겠는가.

아무리 무섭게 때리고 욕을 한다고 해도 자식들에게는 제 아비나 제 어미를 제쳐 놓고 사랑해 줄 사람은 세상 온 천지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어린 것들을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용솟음치는 내 가슴의 용광로 불길 같은 무서운 것을 꺼 버리려고 발버둥치며 내 몸의 살이 여위고 얼굴에 주름 한 점이 더 잡힐망정 남편이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참고 있는 것이다. 누가 뭣이라고 하든 나는 그릇된 일은 하지 않으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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