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가수 백난아의 유작들 왜 이제야 공개됐나-박성서

2023. 9. 3. 12:34가요이야기

'찔레꽃' 가수 백난아의 유작들 왜 이제야 공개됐나-박성서

 

  입력 : 2009.07.25

 

박성서의 노래 속의 WHY

13세에 데뷔한 천재 가수 해방·유신·신군부 거치며

금지곡 지정 등 수난 겪어 제 모습 복원은 시대적 과제

 

가수 백난아(1927~1992·본명 오금숙)가 저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17년이 됐다. '찔레꽃', '낭랑18'로 올드 팬들에게 익숙한 그의 이름을 딴 '1회 백난아가요제'가 제주시와 백난아기념사업회(회장 오경욱) 주최로 이달 26일 제주한림 협재해수욕장에서 열린다.

 

제주도 한림 출신의 백난아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학술심포지엄과 백난아 기록전시회도 함께 개최될 이번 행사에는 미공개 자료 60점도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이 자료들은 1940년대부터의 친필 악보와 발표 당시 음반 전단지, 포스터, 사진들이다. 왜 이 자료들은 백난아가 숨진 지 20년 가깝도록 묻혀 있었을까.

 

백난아가 활동을 시작한 건 194011월이다. 당시 나이 13세로 '오동동극단''갈매기쌍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주위에서 변성기 이전 목소리라는 우려를 했을 정도로 나이가 어렸다.

 

우리나라 최연소 가수로 당시 태평레코드 전속가수가 된 백난아의 노래 대부분은 광복 이전에 발표됐다. 이후 작사가 박영호 등이 월북했던 탓에 발표곡 중 상당수가 월북작가의 곡이라 해서 한동안 방송이 금지됐다.

 

작곡가 입장에서는 이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인 채 사장되어 묻혀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후 가사 일부와 제목 등을 다른 인물에게 개작시켜 작자표기를 달리함으로써 월북작가의 곡이라는 화살을 교묘히 피해갔다.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 시절 백난아의 모습 .  빛바랜 사진 속이지만 청초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

사실상 이러한 노래들은 노태우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기까지 가사가 변형된 채, 또 작가가 바뀐 채 불려 온 것이다. 광복 후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이 노래들은 19615·16 이후 또 한 번의 철퇴를 맞는다. 가요를 '퇴폐의 온상' '사회악'으로까지 치부해 노래를 2절까지밖에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 노래의 가사들이 일부 훼손된 채 불릴 수밖에 없었다.

 

2005KBS'가요무대' 900회 특집방송에서 가장 많이 불린 곡으로 선정될 만큼 국민적 애창곡인 백난아의 대표곡 '찔레꽃'의 경우 월북작가의 곡이 아님에도 한때 금지곡으로 묶여 방송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금지 사유는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동무'라는 단어 때문이다. 1절 끝 부분의 '못 잊을 동무야', 2절에서의 가사 '노래하던 세 동무'에서의 '동무'가 이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해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별수없이 노래가사를 '못 잊을 사람아', '노래하던 동창생' 등으로 바꿔 불러야 했다.

 

이번에 공개된 작곡가 김교성의님 무덤 앞에서친필 악보. 김교성은 백난아의 대표곡찔레꽃에 곡을 붙였다. /박성서씨 제공

 

이런 수난의 역사도 이제 모두 과거가 됐다. 이제 월북작가의 곡들까지 모두 해금되었다. 아울러 원 노래들의 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 가요를 제대로 기록하고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아울러 발표 당시 그대로의 친필 악보나 음반 가사지 등의 발굴은 우리 가요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1992년 백난아 타계 이후 그의 셋째언니 오귀숙 여사(2008년 타계)가 보관해 온 것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필자에게 건네준 자료들과 그동안 개인적으로 틈틈이 발품 팔아 소장해온 자료들이다.

 

친근한 목소리와 탁월한 가창력으로 남긴 아름다운 노래, '찔레꽃' '낭랑18' '아리랑낭랑' '황하다방' '망향초사랑' '직녀성' 등과 더불어 '1인다역(一人多役)'으로 가요계에 헌신했던 백난아는 광복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따 백난아양재학원을 운영했다.

 

직접 '-케악극단'을 창단해 이후 15년간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섰을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수도예술학원을 설립해 후학 지도와 양성에 뜻을 펼치기도 했다. 어려운 시대에 펼쳐보인 백난아의 시대를 뛰어넘는 활동과 정신이 백난아가요제를 통해 되살아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