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둘도 없는 친우, 고복수-손목인

2023. 9. 3. 12:28가요이야기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둘도 없는 친우, 고복수-손목인

출처-손목인의 스타스토리

 

그는 나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사제지간, 선후배간의 예의는 한치도 어긋남없이 지키려했다. 가장 가까웠던 '음악의 동반자'고복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다.

 

고복수의 고향은 경남 울산. 보통학교시절 이미 남다른 음악적 재질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노래가 하고 싶어 울산장로교 합창단에 들어갔다. 그때는 지금처럼 음악학원이나 개인교습소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익히려면 교회의 합창단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린시절 교회를 다니며 그곳에서 음악성을 길렀고 또 그 때문에 교회를 계속 다닌 것을 알수있을 것이다.

고복수는 교회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드럼치는 것부터 배웠고 그다음으로 클라리넷을 불었다. 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결국 울산실업중학교에 특채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전국가요콩쿠르에서 입상했고 그것이 인연이 돼 가수생할을 시작하게 됐다.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해 OK레코드사에 픽업이 돼 데뷔곡을 내놓은 곡이 바로 <타향살이>였다. 작곡가인 나와 작사가인 금릉인, 가수 고복수는 이후트리오를 이뤄 많은 노래를 만들어냈다.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 / 사막은 영원의 길, 고달픈 나그네 길 / 낙타등에 굼을 싣고 사막을 걸어가면 / 황혼의 지평선에, 석양도 애달퍼라'

<타향살이> 후속으로 만들어진 이 곡 <사막의 한>도 짭짤한 히트를 했고 <짝사랑>'--'명트리오가 이끌어낸 또하나의 대히트작이었다.

', ,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 여울에 아롱젖은 어지러진 조각달 /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이 곡은 고복수의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고 고복수 자신도 즐려불렀다고 한다.

 

OK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있었던 금릉인(金陵人: 김릉인이지만 금릉인으로 불렸다)<타향살이> <짝사랑>등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남녀의 사랑이야기보다는 나라잃은 민족의 한을 담은 내용의 것이거나 고달픈 인생살이를 읊은 것들이어서 당시 대중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금릉인은 항상 좋은 노랫말을 지어낸 재주꾼이었으나 항상 구슬픈 내용의 가사와 같이 지병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나그네길 /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 /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가는지 알수없는 사막의 길'이라는 노랫말처럼. <타향살이>는 멜로디 자체가 짧고 쉽기 때문에 일반대중들도 한번만 들으면 따라부를 수있는 노래이다. 고복수가 이 노래를 부를때면 모든 관객들이 어느새 다 따라부르고 있어 아예 마이크는 객석으로 돌려놓았다.

 

만주 하얼빈 공연때는 그 감격이 더욱 진했다. 고향을 떠나 북간도에서 오랜 객지생활을 하던 동포들에게 이 노래는 특별한 것이었고 공연을 가기전 누가 미리 전해준 것이 아닌데도 모두다 노래할줄 알고 있었다. 고복수가 한소절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고 사절이나 되는 노래지만 몇번이고 앙코르를 청해 무려 열번이나 <타향살이>를 반복했다.

간도 용정(間島 龍井)공연때는 노래가 끝나고 무대뒤로 30세 가량의 중년여인이 찾아온 일이 있었다. 고향이 부산이고 가사 그대로 타향살이한지 10년이 넘었다고 밝힌 그녀는 남편이 전쟁통에 죽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행에도 한번 못가보는 신세라고 울먹였다. 그녀는 혹 부산에 공연갈 기회가 있으면 그곳 식구들에게 안부나 전해달라며 고향집 주소와 편지를 쥐어주었다.

고복수를 만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이 여인은 그날 너무도 감정이 격해져 밤새도록 울던 끝에 극약을 먹고 자살을 해버렸다.

고복수는 그 다음날 이 소식을 전해듣고 마치 자신이 그녀를 죽인것 같은 죄책감에 몸부림쳤고 나는 그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해줄수 있는 것은 자네가 더욱 열심히 무대에서 노래하는 거야. 어서 일어나 무대에 오르세"

눈물을 씻고 무대에선 고복수는 그날 그 여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타향살이>를 불렀고 그 사정을 전해들은 관객들도 함께 흐느끼며 슬픔을 나누었다.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훤칠한 키에 말쑥한 용모, 항상 연미복을 쭉빼어 입고 무대에 선 고복수는 여성팬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한때는 극장앞에 장안의 한다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10여대씩 늘어서 어느 것을 탈까하고 고민했고 만나주지 않는다고 머리가 돌아버린 여인이 집안에 '고복수'의 이름을 외치면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가 <타향살이>로 데뷔한지 1년이 채 안됐을때 이야기 한토막. 그리 뛰어난 용모는 아니었어도 성격이 착하기 그지없고 여성적인 매력이 진하게 풍겼던 이난영은 고복수에게도 어느새 연심을 품게 했던 모양이었다.

며칠동안 고복수가 내 주위를 맴돌며 무슨 말을 건넬듯 하다가는 말고 하는 눈치가 보이더니 마침내 결심한듯 내게 다가왔다.

"손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십시다"

그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봐왔던 나는 혹 전속으로 있는 OK레코드사라도 떠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으로 그가 가자는 대로 조용한 다방에 가 마주 앉았다.

", 실은 난영이가 좋아 죽겠습니다"

말을 꺼낸 고복수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뜻밖의 말이 나온 것과 그가 몸둘 바를 몰라하는 것이 우스웠지만 근엄한 표정으로 "그래서 어덯게 하겠다는 거야. 내게 왜 그 이야기를 해. 좋으면 혼자 좋아할 것이지"하고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는 또한번 머리를 긁적이며 "그래서 선생님이 난영이와 저를 연결시켜 주십사하는 겁니다"

고복수는 말을 마치고 품에 고이 접은 편지봉투를 하나 꺼냈다.

"말은 못하겠고 제 마음을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난영이에게 전해주십쇼. 자나깨자 마음이 설레 노래공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복수의 애틋한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한눈팔고 있는 그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나를 대체 뭘로 보고 그런 심부름을 시키는거야. 보바보자하니까 못하는 짓이 없어"

나는 소리를 버럭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짝 놀란 고복수는 나를 다시 자리에 앉히며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이후 고복수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애태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고복수의 인기는 계속 올라갔고 눈코뜰새없이 바쁜 스케줄과 몰려드는 여성팬들로 이난영에 대한 생각은 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 얼마후 OK레코드사에 들어온 신인여가수 황금심(黃琴心)과 사랑에 빠져 3년간의 열애끝에 결혼에 골인, 새로운 생활에 접어들고 있었다. 12살 아래인 황금심의 내조는 극진했다. 인기절정에 있을 때는 돈이 궁한줄 모르고 화려한 생활을 했으나 은퇴후 말년에는 사업에 실패, 서적외판원을 하는 신세가 됐던 고복수였지만 황금심은 그가 722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죽기전 1년동안 신경성 고혈압과 식도염으로 투병생활을 할때 황금심의 간호는 눈물겹기 그지없었다.

 

황금심은 남편이 세상을 뜬후 홀로 지내며 모범적인 사생활을 했고 32녀의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최근에는 세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일출봉'이라는 형제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본받을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복수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때 병원에 찾아가 만났던 일이 떠오르면 아직도 가슴이 저려온다. 당시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 음악견학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보지 못하다 죽기 1년쯤 문병을 갔었는데 고복수는 나를 보고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하며 부둥켜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는 이제 '영원한 타향살이'를 떠나 곁에 없지만 언제까지나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둘도 없는 친우이다.

 

고복수 주간한국 추억의 LP 최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