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0. 16:16ㆍ가요이야기
이 글은 지난 1967년에 성음사(省音社)에서 발매한 '가요 반세기'라는 전집물의 해설문을 발행인의 허락을 얻어 보완한 것입니다. 1920년대 초창기부터 1960년 무렵까지 우리나라 가요사를 정리한 내용 가운데 오류가 있는 대목을 고치고 부족한 대목을 채워 넣었으며, 일부 표현은 알기 쉽게 바꾸었습니다.
한국 가요사 개설 총 4부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연재 순서는 1. 요람기 2. 황금기 3.수난기 4. 재생기 입니다. <가요114>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 내 가슴 누가 알 거나
<방랑가 : 이규송 작사, 강윤석 편곡, 이애리수 노래(1930)> 노래 - 강석연
지금까지 우리 곁에 맴돌고 있는 이 '방랑가'는 곧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낯설은 만주, 연해주로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그야말로 피 식은 젊은이의 비탄을 담았던 것이다. 우리 가요사 초기의 노래 가운데에는 이런 비탄조의 망명가, 유랑의 노래가 많다.
흘러가는 이 신세 물에 뜬 버들잎
흐르고 또 흘러서 어디로 가나
정든 고향 내 집이 차마 그리워
해 다 지고 저문 길 눈물에 아득하네
('유랑의 노래', 김서정 작사, 작곡, 이애리수 노래, 1931년)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 찾아
일엽편주 둥실 띄워라 달맞이 가자
저 달마저 내 가슴의 이 설움 풀까
아 나의 일생 고향이 그립기도 하다
<유랑인의 노래 : 채규엽 작사, 작곡, 노래, (1930)>
비련과 눈물, 탄식, 향수, 이런 것이 유랑의 노래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망명가였지만 이러한 정한의 노래가 그 무렵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을 쳤고,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말하자면 유행가(대중가요란 말은 태평양전쟁 직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의 효시는 이런 비탄조의 망향가였다.
이때까지의 노래라곤 창가집에 실린 '학도가'나 '권농가' 등의 교훈가와 종교계통의 '불어라 봄바람'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학도가'는 가사 내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도자(그 무렵 세칭 개화꾼)들의 기백을 읊은 노래로 소위 동경유학생들이 방학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플랫홈에서 젊은 목소리로 곧잘 합창했다고 한다.
최초의 창가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예는 극히 드물고, 외국 곡조에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많았다. 애국가가 '올드 랭 자인'이었고, '모란봉가'가 미국의 민요, '학도가' 역시 일본의 철도개통기념가 곡조라는 설이 있다.
좀 뒤에 나온 것으로 새로운 서구 문물에 대한 경이를 노래한 '비행기'란 창가도 있었다.
따라라 따라라 중천에 높이
떠 따라라 따라라 비행기 난다
날개를 활짝 펴고 천천히 날아 올 때
프로펠라의 소리 멀리서 들린다
용감하구나 용감하구나 넓으나
넓은 하늘을 제 세상처럼
따라라 따라라 따라란따단띄라
따라라 따라라 따라란따단띄라
넓으나 넓은 하늘을 제 세상처럼
비행기에 대한 경이,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 일이지만 그 무렵엔 이렇게 비행기에 관한 노래가 곧잘 불렸다. 1922년 12월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할 떄의 경이와 감격을 노래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란 노래와 함께 애창되던 노래였다.
1922년 7월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토월회가 여름방학 때 첫 신극 공연을 하면서 막간에 '아리랑고개'를 내놓았다. 아리랑은 본래 전래민요로 현재의 아리랑에 비해 퍽 느린 곡조인데 이것을 개사, 변조한 것이 토월회 공연 때의 '아리랑고개'였다.
그 후 영화감독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 때 이경손(당시 영화감독)이 민요 노트에서 이 아리랑에 착안하여 주제가를 만든 것이 불멸의 명작 '아리랑'을 만든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전래민요 '아리랑'은 지방에 따라 가사가 달랐지만 토월회 막간물에 등장한 '아리랑고개' 가사에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문전옥답을 다 어디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이렇게 쫓겨가야 하는 겨레의 비탄이 담겨 있었다.
1931년에 발간된 '정선조선가요선집'(조선가요연구사편)에는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먹칠된 가사 중에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싸우다 싸우다 아니 되면
이 세상에다 불을 지르자
<아리랑 : 심연옥>
방화라도 하고 싶도록 격렬한 적의와 울분을 담은 이런 가사의 '아리랑'이 당시 불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에 이 가사가 없는 것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금지되었던 탓인 것 같다.
이런 노래들은 흔히 막간가수들에 의해 전국으로 퍼져 갔다. 수십 개의 신파극단이 정극과 희극 사이에 막간물이라는 것을 했고, 그 막간물엔 극단에서 노래 솜씨 있는 배우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막간가수는 아마츄어가수였지만 그런 대로의 명성을 가지기도 해서, 강석연, 김연실, 이애리수 등이 유명했다.
김연실은 '아리랑고개', 강석연은 '방랑가', 이애리수는 '라인강'을 곧잘 불렀다.
[레코드시대의 여명, '사의 찬미']
축음기와 레코드가 우리나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엽. 유성기와 소리판으로 불렸던 이 축음기와 레코드는 진기하기만 했다. 맨 처음 활동사진이 들어왔을 때 영사가 끝난 후 옥양목 스크린을 두드렸고, 맨 처음 서울 장안에 YMCA 회관이 들어섰을 때 벽돌집이 무너질까봐 행인들이 그 밑을 지나가길 겁냈던 것처럼, 축음기와 레코드는 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약삭빠른 장사치들은 이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장터에 천막을 치고 돈을 받고 들려 주는 영업을 하기도 했다.
처음 들어온 레코드는 거의 일본 노래나 서양음악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래의 첫 취입으로 남아 있는 레코드는 1907년에 나온 것이며, 이후 연예계를 주름잡던 이기세가 파고다공원 맞은편에 일본 일동레코드의 지점을 차리고 우리 명창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취입을 하기도 했다.
남도잡가는 김창룡, 이동백, 이화중선,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는 이진봉, 이영산홍 등이 있었다. 남도소리엔 '새타령', '육자백이', '춘향전' 몇 대목, 경기잡가와 서도잡가 중엔 '노래가락', '창부타령', '사설난봉가', '수심가' 등의 여러 곡이 취입됐지만 '이팔청춘가'가 그 중 애창되었다고 한다.
윤심덕
최초로 가요 취입을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가운데에는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 있다. 그 역시 이기세의 주선으로 일동레코드에서 가곡 취입을 했다.
1926년 8월 3일 취입을 하고 돌아오던 윤심덕은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애인 김우진과 함께 검푸른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 이 정사 사건은 큰 화제거리가 되었고, 예정에도 없던 곡을 그가 자진해서 취입했다는 '사의 찬미'는 크게 유행하여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사의 찬미 : 윤심덕 작사, 이바노비치 작곡, 윤심덕 노래(1926)>
'사의 찬미' 축음기 레이블
이바노비치 작곡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곡조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인 이 애절한 노래는 정사의 전설과 함께 실의에 찬 민중들의 가슴을 쳤다. 새까만 제비표 레코드에서 흐느끼듯 흘러나오는 단음계의 구슬픈 선율을 그들은 목메인 소리로 따라 불렀던 것이다.
[막간가수들의 성좌]
1928년 빅터레코드와 콜롬비아레코드의 경성지점이 들어오기 이전과 그 이후로도 한 동안은 노래의 유행은 레코드보다 순회극단 막간가수들의 노래로 번져갔다.
채규엽
당시의 가수 제1인자는 하세가와 이찌로(長谷川一郞)란 이름으로 일본 노래도 곧잘 불렀던 채규엽. 훗날 대머리가 되자 무대에 설 땐 숯을 발랐다는 이 호괘한 가수 채규엽은 '봄노래 부르자'를 곧잘 불렀고, 자신이 지은 노래 '고독한 꿈', '유랑인의 노래' 등으로 청중의 가슴을 슬픔으로 메웠다.
원래 연극배우였고 후에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떨쳤던 김연실은 고운 몸매, 단아한 용모, 초롱초롱한 눈매의 미녀로 그의 노래는 청중들을 도취하게 했다. 그는 활동사진 '낙화유수'와 '세동무'의 주제가를 불러 이름을 떨쳤다. '낙화유수'(일명 '강남달')는 짜릿한 민족감정이 연모의 노래로 위장되어 있어 삽시간에 퍼져 갔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낙화유수 : 김서정 작사, 작곡, 이정숙 노래(1929)>
이 노래는 김연실에 앞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이정숙의 노래로 나와서 신나게 팔려 나간 것이었다.
강석연은 귀여운 얼굴의 단발머리 소녀로 '방랑가', '오동나무' 등을 곧잘 불렀다. 이경설 또한 이 무렵 활약했다. 사실 이 시대엔 몇 곡을 제외하고는 노래에 주인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이애리수
시베리아 찬 바람이 지구상에 떨치니
보기는 죽은 듯하나 실상은 살았도다
버러지는 땅에서 들썩들썩하면서
양춘가절 기다리면서 나오기를 힘쓰네
<부활 : 이애리수 노래(1931)>
'부활'이란 이 노래는 곧 망국의 슬픔을 묘사하는 양 절실해서 곧잘 불렸고, '카츄샤', '종로행진곡', '실연' 등은 자유연애의 신사조가 얼어붙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녹이면서 그들의 울렁대는 심정과 맞아떨어져 애창되었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김서정이었다. 김서정은 김영환이란 이름으로 활동사진 변사도 했던 사람으로 최초의 가요 작곡가인 셈이다.
왕평(극단 대표)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일본인들까지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애창했던 '황성의 적'(일명 '황성 옛터')의 탄생이다.
1929년 어느날 황해도 배천의 어느 여인숙엔 비에 갇힌 순회악극단이 묵고 있었다. 창 밖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발을 보고 있던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은 문득 몇일 전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회가 치밀었다. 푸른 달빛 속에 흩어진 옛 기와, 황폐한 성의 애수, 이런 것이 가슴에 젖어 들면서 손길은 바이올린을 더듬었다.
이 선율이 곧 '황성의 적'.
그 악극단의 대표였던 왕평이 작사해서 이애리수에게 연습을 시켰다. '황성의 적'이 서울 취성좌에서 청순한 가희 이애리수의 노래로 불렸을 때 청중은 울면서 합창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황성의 적(跡) :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1932)>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자 왕평은 이 노래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한때 일제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단속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불멸의 민족가요인 것이다.
흐름도 정결타 라인강 물
푸른 물결 부딫히는 저 건너편에
여기 저기 방황하는 젊은 두 남녀
그 무엇에 신비를 소근거리나
<라인강 : 이애리수 노래(1931)>
이 '라인강'을 부르기도 했던 이애리수는 '황성의 적'으로 민족의 애인이 되었던 것이다.
글 : 이준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수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사의 찬미(외)](2006),
[일제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200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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