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시대(18) - 1939년, 레코드 가수 인물론

2023. 8. 20. 16:03가요이야기

유행가 시대(18) - 1939년, 레코드 가수 인물론     글 : 이준희

1935년에 잡지 '삼천리'에서 발표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와 같이, 정확한 수치에 따라 가수들의 인기 순위를 보여 주는 자료는 이후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30년대 후반 가수 인기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939년 1월에 창간된 잡지 '신세기'를 보면 같은 해 9월호에 '레코드 가수 인물론'이란 기사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5대 음반회사에 전속된 사람을 중심으로 당시 인기 있는 유행가 가수 스물 일곱 명에 대한 짤막한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1935년 기사에서 거론된 주요 가수 열 아홉 명(10대 가수 열 명에 인기투표에서 300표 이상을 얻은 기타 가수 아홉 명을 더한 수)과 1939년 기사에 실린 가수 스물 일곱 명의 면면을 비교해 보면, 4년 동안 전개된 30년대 후반 유행가의 흐름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 동안 어떤 가수가 새롭게 등장했는지, 계속 인기를 유지했는지, 사라졌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의 유행가가 인기를 끌었는지, 각 음반회사의 세력 분포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추정도 어렵지 않게 해 볼 수 있다.

 

먼저, 어떤 가수들이 새롭게 등장했는지를 '신세기' 기사 순서에 따라 음반회사별로 살펴보면, 첫 번째로 빅타레코드에서 송달협, 이인근, 박단마, 황금심, 안옥경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1937'날 두고 진정 참말'로 데뷔한 박단마와, 1938'알뜰한 당신'으로 데뷔한 황금심은 이른바 '에로틱'한 경향의 유행가를 많이 불러 대중의 인기와 식자층의 비난을 동시에 얻으면서, 30년대 말 빅타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었다. 소위 '에로틱'한 유행가가 정확히 어떤 노래들을 가리키는지 실례가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박단마의 대표곡인 '나는 열 일곱 살' 같은 애교 짙은 곡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콜롬비아레코드 소속으로는 김해송, 유종섭, 김영춘, 강남주, 남일연의 이름이 새롭게 보이고 있다. 사실 김해송은 1935년 오케에서 데뷔하여, 주요 가수에 들지는 못 했지만 '삼천리' 인기투표에서도 소수 득표자로 이미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가수로서보다 작곡가로서 더 큰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편, 남일연과 김영춘은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제가의 대성공으로 콜롬비아의 대표 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케레코드에서는 이인권,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의 면면이야말로 유행가시대를 가장 화려하게 주도한 30년대 말 오케의 기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눈물 젖은 두만강'(김정구),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같은 이들의 대표곡이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오케 가수진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일시적인 침체기를 거친 뒤 1939년 들어 나란히 재출발하게 된 태평과 폴리돌에서는 박향림, 송기옥, 현정남이 새로운 인기가수로 나온다. 19391월에 태평에서 데뷔한 백년설이 거론되지 않은 것이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대체로 빈약한 가수층은 당시 두 회사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후 태평은 백년설에 이은 진방남, 백난아 등의 등장으로 오케와 함께 2강으로 거론될 만큼 성장하게 되지만, 폴리돌은 끝내 왕년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1935년에 인기가수로 뽑힌 열 아홉 명 가운데 '인물론'에서도 여전히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열 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1939년 당시 소속 음반회사별로 나누어 보면, 빅타에 김용환과 이규남(임헌익이 새롭게 바꾼 이름), 오케에 고복수와 이난영, 태평에 채규엽와 최남용, 폴리돌에 김복희와 선우일선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복수, 최남용, 김복희 등은 이전과 같은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고, 강홍식과 윤건영은 거명은 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 무렵에 이미 가수로서 활동을 그만둔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막간가수나 기생, 배우 출신 가수들의 퇴조가 뚜렷하고, 유행가 가수의 전문화 현상이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레코드 가수 인물론'의 작자는 당시 유행가계의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화자나 이은파 같은 인기가수는 빠뜨리면서, 그보다 훨씬 활동이 부진한 사람은 오히려 거론하고 있고, 몇몇 가수의 음반회사 전속 상황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 특히,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 같은 사람인데도 박향림과 박정림을 마치 다른 두 사람인 것처럼 적고 있는 것은 분명한 오류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또 거꾸로 보면 비전문가 입장에서 본 내용이 당시 대중의 정서에 더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기에, '레코드 가수 인물론'은 단순한 인물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자가 인기가수들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며 가장 자주 사용한 단어가 '애수'인 것을 보면, 30년대 말 유행가의 흐름을 주도한 경향이 무엇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준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수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사의 찬미(외)](2006),
[일제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200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