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머금고 남편 남인수와 이혼했다 김은하

2023. 7. 21. 10:27가요이야기

눈물을 머금고 남편 남인수와 이혼했다 김은하

눈물을 머금고 남편 남인수와 이혼했다

                                                                                                                            김은하

연적 이난영에게 남편과 4남매를 빼앗긴 여인의 단장의 수기 !!

* 이 글은 잡지 '주부생활' 1958년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비록 김은하씨 시각만 반영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당시 남인수-김은하-이난영 세 사람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글 내용으로 볼 때 남인수님은 1958년 10월 현재 이미 이혼을 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다소 과격한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파경 직후 김은하씨가 격앙된 감정을 토로한 글이므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남인수팬클럽 회보 제16호(2005/03)

내가 이혼하기까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달픔과 눈물 어린 생활의 연속이었음을 미리 말해 둔다.

나는 이것으로써 세상이 떠들썩하리만큼 소란했던 소문도 이에 막을 래릴 수 있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나는 완전한 무로 돌아가고 싶으며 이제 다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으며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빌면서 이 기회에 나의 생활의 총결산을 해 보려는 것이다.

생각하면 운명의 해였다

이제 생각하면 이해는 운명의 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에게는 다시도 있을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또한 나의 운명의 갈래길에서 나를 조종한 짓궂은 운명의 장난의 해였다고 말하고 싶다.

결혼생활 18년이란 세월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말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의 인생관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성이면 누구나 자기가 가야할 운명의 길이 있다. 나는 내가 가야할 운명의 길을 이 해에 있어 더 완전히 가르킴을 받아 본 셈이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 않다. 모는 것을 되어 가는 대로 맡겨 볼 생각 뿐이다.

 

3개월 이상은 못간다고 믿었다

나의 남편이었던 남(남인수)씨가 또한 나의 언니격이 되는 이(이난영)씨와 얽히다니 참으로 나는 상상하기조차 메시꺼운 일이다.

가수협회가 창설된다 또는 고(고복수)씨의 은퇴공연 등등의 일들은 모두 그들을 결합시켜 주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그쳤으니 나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한국의 예술가를 생각해서라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약 일년 전 이난영씨와 남인수씨와의 치정관계가 이러니 저러니 하여 지상에 발표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을 칠 뿐 하등의 커다란 쇽크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과의 18년간의 생활을 통하여 그의 인간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에게 친절한 그는 항상 여성들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그 여성에게 빠져버리는 예는 없었다. 어떤 여성을 사귀이거나 절대로 3개월 이상은 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남인수씨와 동서생활을 한 여성들은 누구나 자기가 먼저 단념하는 법이 없었다. 꼭 나의 남편이 먼저 특툭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그것이 한결같이 모두 3개월 이내에 곧 쉽게 청산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그의 습성으로 알게 되었으며 나도 상대방의 여성을 보게 되면 며칠자리이며 몇 개월자리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며 내가 생각한 대로 틀림이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새로운 결론을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아모리 많은 여성들을 상대로 하여 보지만 자기의 아내보다 나은 여성은 없다고 하는 결론을 그의 입을 통하여 들을 수가 있었으며 내 자신도 역시 꼭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이난영씨와의 관계도 불과 3개월이 지나지 못해서 청산되고 말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 당시 나는 이 '주부생활'잡지에 "나의 남편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자신이 만만하게 계재했던 일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의 오산이었다. 참으로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고 하는 속담도 있지만 철석같이 남편의 마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짓궂은 사람들은 은하씨 참으로 3개월이 지나도 안 돌아오면 어쩔래요...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으나 나은 가벼운 어조로 안 돌아오면 말죠, 그까짓 이혼해 버리죠... 이렇게 대답은 하는 것이었으나 털끝만치도 이혼문제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남편에 대해서 자신을 갖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남성을 몰랐던 탓인지 모른다.

결혼 후에 남편만을 위하여 살아 오는 온실에서 피는 꽃과 같이 세상을 너무도 모르고 남성을 너무도 모르고 살아 온 탓이라고 하겠다

 

남편보다 찰거머리 같은 여성

그러나 나는 차차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3개월도 아득하게 지났으며 5개월 6개월이 되어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었다. 이럴 때 나는 남편을 만나기만 하면 짜증을 부렸다.

나도 이상 참을 수가 없오.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이죠?

남편은 매번 울상을 했다.

좀 더 참어 주어요. 지금 그(이난영씨를 말함)의 집 형편이 억망이니 좀 정리를 해 주어야 할 것 아니요. 남자가 없이 살아가는 집이 오죽하겠오.

이런 남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또한 약한 마음의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에 대한 애정이 살아 있는 탓인지 말 없이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남편의 말에 순종했었다.

그러나 좀처럼 일의 해결은 되지 않았다. 악착같이 붙어다니는 이난영씨의 찰거머리 같은 존재를 좀처럼 떼어 버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말을 일방적으로 믿는다기보다는 이난영씨는 하루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겨우 한다는 말이 나는 참으로 분하고 놀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인수씨와의 관계를 영원히 끊게 하지 말아 주어요. 나는 남인수씨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오.

이렇게 애원하는 이난영씨의 말에 나는 좀처럼 가라앉았던 불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한 마디 내던지고 돌아서고 말았다.

나는 내 남편이 못 살겠다고 하는 경우엔 어느 때라도 물러서겠오. 나는 몸도 당신보다는 건강하고 생활력도 당신보다는 났오. 그러니 나는 얼마던지 혼자 살아 갈 수도 있는 몸이요.

더 이상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옳은 일 그른 일의 판단력을 잃고 만 불상한 인간상을 앞에 놓고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때부터 또한 남 몰래 심각한 고민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악착같이 나오는 여인 앞에서 남인수씨도 갈 길을 잃고 말았는지 모른다.

생각의 생각을 거듭한 남인수씨는 이난영씨의 장래를 위하여 당분간 절에 가서 몸의 수양을 할 것을 건의했던 모양이다.

 

산에서 뛰쳐나오는 熱女

산에 들어가게 된 이난영씨를 가까운 친구들은 퍽 좋게 생각하였다.

이제 잘 되었지.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자기 몸을 수양하여 하루 바삐 무대에 나서게 되어야지. 아버지 없는 불상한 칠남매가 어머니까지 잃어서는 너무 가엾은 일이야.

어렇게 남의 일 같지 않게 생각들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도 이제는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이 되나 부다 하고 희망을 가지는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 이난영씨 가정에 속히 행복이 찾아오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리하여 김씨스타-(민자, 숙자, 애자양)의 취직을 알선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희망도 역시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이나 있었을까! 수양을 위해서 입산한 이난영씨는 못내 그의 곁이 그리웠음인지 다시 산에서 뛰쳐나고고야 말았던 것이다.

남인수씨를 찾아 달려드는 열녀를 볼 때 나의 가슴은 묺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드디어 이혼을 감행하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희망은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산에서 나오자 대전에 있던 남인수씨를 곧 찾아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기 자식 버리고 남의 자식 맡는 심정은?

산에서 뛰쳐나온 그 열녀는 자기가 낳은 칠남매를 버리고 나의 자식 4남매를 맡겠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였다. 도저히 올바른 정신상태로는 그럴 수가 없으리라고. 그러나 자기가 맡겠다는 데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애들은 몹씨 아버지를 따르는 편인데 너무도 오랫동안 아버지와 떨어져서 생활을 하니 퍽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나의 자식 4남매를 맡겠다는 그 이상의 야릇한 심정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단연코 남편에게 이혼할 것을 표명했다. 남편은 몹씨 놀래는 표정이었으며 같이 진주에 내려가서 살자고 권했다.

진주는 나의 고향이기도 하며 남인수씨는 진주의 시립극장을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천만의 말씀이었다. 무엇때문에 한 남성을 두고 두여인이 경쟁을 하여야 한담! 나의 성미는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나 자식을 잘 기르나 보자.

이런 결심을 하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짐, 아이들의 짐, 그리고 집에 놓아 두었던 이난영씨의 짐 등을 깨질새라 모두 정성껏 꾸려서 보냈다. 짐을 꾸리고 있던 남인수씨와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18년간이나 한 집에서 살아 왔건만 이렇게 여성 하나의 힘으로 서로 남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알고도 모를 일이 사람 팔자라 나는 유행가의 1절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한 잠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남편과 4남매를 빼앗긴 셈이다.

짐을 꾸리고 있는 동안에도 이난영씨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사람을 수차례 식 보내 왔던 것이다.

참으로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나는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저주했을 것이다. 한 여인의 불행을 밑받침으로 자기의 만족을 취하려는 그 심정을 나는 죽어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무리 감정적인 인간이라도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판단할 줄 아는 이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이 또릿또릿한 자기 자식을 다 버리고 남자의 자식을 맡아서 기르겠다고 하는 뱃심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렇게도 떨어질 수 없는 무엇이 개재하고 있을까?

 

나대로 살겠다

나는 지금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나는 나대로 취미 부칠 곳을 찾아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생각이다.

이것도 역시 나의 운명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옛날과 같이 남편과 어린애들의 양육만을 위하여 세월을 보낼 때와는 인생관이 달라졌다.

나와 같은 환경 속에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좀더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의 운명대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운명을 거역하려고 할 때 무리가 생기는 것이며 파탄은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정은 파탄이 되었을 망정 내자신의 파탄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남인수씨가 병들어서 눕게 되는 경우 나는 그때에는 어린 자식들을 책임져야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으며 그때를 위하여 미리 토대를 잡아 둘 생각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있을라치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당장에 팔고 나오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내 남편이었던 남인수씨의 행실을 나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난영씨도 남인수씨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맥힌 사실인가. 오히려 그녀를 내가 동정한다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나의 사랑은 끝난 것이다. 참으로 남인수씨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줌으로서 나와의 인연을 끊고 싶을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