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이야기 .8] 막간가수, 이애리수

2023. 9. 3. 13:03가요이야기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8] 막간가수, 이애리수

이동순 시인 영남대교수

1932년 최초 레코드 취입곡명 '荒城', 1개월 만에 5만장 넘는 경이적 판매 기록

황성의 적(황성옛 터)

고려 옛 궁터 만월대 빗대 망국 설움 노래, '아리랑' 주연 신일선 막간서 맨처음 불러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황성(荒城)의 적()'('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한 경과를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애리수는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이름이 보전(普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과 전수린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젖은 두 사람은 눈물에 젖어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에게 연습시켜 막간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어여쁜 배우였습니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습니다. 모든 청중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터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난 이 심사를 가삼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터야 잘 있거라.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렸지요.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지요.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지요.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차츰 퇴조하게 됩니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관심권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앞을 가로막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극약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정사를 시도합니다. 겨우 구출되어 기력을 회복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수의 슬프고 애잔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이애리수

'황성옛터' 가수 이애리수 98세 생존

1932년 음반 5만장 폭발적 인기, 22세 결혼하며 무대 떠나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쇠잔한 고려궁궐터인 개성 만월대에 빗대 나라잃은 슬픔을 노래한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씨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5일 노년시대신문에 따르면 이애리수는 현재 일산의 한 요양시설에서 98세로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지만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세대의 기억속에 진한 향수로 남아있는 황성옛터는 1928년 단성사에 열린 극단 취성좌 공연의 막간 무대에서 당시 18세이던 이애리수의 노래로 처음 소개됐다.

 

이애리수는 본명이 이음전인데 개성에서 태어나 9세에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다 18세에 황성옛터를 처음 부른 뒤 1932년 음반이 나온 뒤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신극좌, 민중극단, 취성좌 등에서 야역배우로 활동하며 여배우로 성장해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등 흥행극단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여배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가가수로 활동하며 1931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 번안곡을 데뷔곡으로 음반을 취입한 뒤 1932荒城(황성옛터 옛이름)이란 제목으로 음반이 발매된 후 5만장이 팔려나가는 등 당시로선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애리수는 22세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우여곡절끝에 사랑을 이룬 뒤 27녀를 낳아 기르면서 완전히 대중곁에서 사라졌다. 노래만 남긴 채. 하지만 그의 노래는 조선총독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1)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2)

 

1932년 음반으로 발매된 후 5만장이 팔려나가는 등 당시로선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현재 이애리수는 일산의 한 요양시설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성옛터' 부른 가수 이애리수 별세

2009-04-01 15:17 스포츠 조선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씨가 331일 오후 3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다. 빈소는 경기도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그동안 이애리수씨는 일산의 한 요양시설에서 간병인과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왔다.

 

 이애리수씨는 1928년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18세에 가수로 데뷔한 후 1932'황성의 적'이란 음반을 발매해 5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올렸다.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의 국민들의 삶을 위로해준 곡으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국민가요다.

 

  <인터넷뉴스팀